세 천사의 경고 4 (계 14:9-10)
세 천사의 경고 4 (계 14:9-10)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이 시간은 “세 천사의 경고”라는 제목으로 ‘양심의 고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일한 문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깊은 물로 이끄시는 것은 물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119:71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런데 고난 속에서도 가장 극심한 고통은 양심의 고통입니다. 다른 고통은 다칠 때만 아프지 시간이 가면 뇌에서 모르핀을 보내 아픔을 경감시키지만 양심의 고통은 그 아픔이 줄어드는 법이 없고 더욱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지옥 불과 같다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도 넓은 차원에서 보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연단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즉 짐승의 표를 받은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 아직 육신을 따라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이고 고통인지 우리에게 깊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 양심의 고통은 누가 당하나요?
1. 이 고통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당하는 고통입니다.
9절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누구든지”라고 했어요. 이 '누구든지' 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암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라는 뜻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일지라도 그런 의미도 됩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죄에 대한 양심이 무뎌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한 즐거움의 대상이죠. 세상 사람들도 양심의 고통이 있긴 합니다. 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참변을 당할 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상당히 드물고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속죄의 복음으로 그 양심을 평안하게 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죄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그 양심은 아벨처럼 하나님을 향해 그 피 값을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계18:4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여기 보세요. 다른 백성이 아닙니다. 내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벧전5:8-8에도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주 안의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알고도 세상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을 비극 속으로 던져 넣는 심히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히6:4-6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여기 빛은 진리 혹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그러면 아직 미숙한 믿는 자들은 희망이 없나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다음 9절에서 이렇게 위로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이것이 원리이지만 아직 거기까지의 타락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은 타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락의 중간에서 방황할 수 있고 거기서 당하는 양심과 삶의 고통은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거듭 난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아직도 하나님과 세상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고통을 신자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아주 위험한 과정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면 지나친 정죄에 빠져 사탄에게 잡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진리를 찾아 방황하다가 이단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의 문제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당하는 고통이라.
2. 이 고통은 마음과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가 받는 고통입니다.
다시 9절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여기 짐승은 육신을, 그의 우상은 육신이 동경하는 세상적인 죄악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마는 인격, 손은 행위, 그러니까 아직도 죄를 벗어나지 못한 육신에 속한 자를 가리킵니다. 표는 인증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넌 육신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자에게 고통이 임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경고했습니다. 벧후2:10-14에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 저주의 자식이라”
그러나 택한 백성들도 이런 양심의 고통과 삶의 징계를 받지만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체험하고 또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딤후3:1-5에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전6:10에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룩함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이 심히 좁은 문의 과정입니다. 마치 진주가 고난 속에 만들어지듯 우리 성도들도 고난 속에서 참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666표를 받는 자의 고통은 바로 세상을 따르는 자가 받는 고통임을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이 고난은 누구도 피할 수 없고 경감되지 않는 그런 고난입니다.
10절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여기 "그도"라는 낱말 속에 이 고난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진노의 포도주란 극심한 고난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고난을 잔으로 표현했습니다.
마 26:27에 “또 잔을 가지사 - 그들에게 주시며 -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하셨고, 마26:39에서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포도를 짓밟아 포도주를 만들 듯 짓밟으신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시66:10-12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원수에게 머리를 밟힌다는 것은 패배를 말합니다. 포로의 고통이란 인간도 아닌 취급을 당합니다.
다음에 포도주를 만들려면 밟기만 합니까? 누르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시32:4-5에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했습니다. 이것이 심령의 고통입니다.
그 다음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포도주는 물에 희석해서 음료로 마시는데 그렇지 않으면 매우 독합니다. 그래서 많이 마시면 속이 매스껍고 취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시는 발효액 효소음료도 보통 10배 이상의 물에 타서 마셔야 합니다.
이처럼 징계 속의 우리 심령은 순수한 고통 그대로 조금도 봐주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일을 양심과 율법이 대행하고 있는데 이들의 칼날은 조금도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만나기 전에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느냐며 호소했습니다. 이 죄의 고통을 아는 자만이 죄를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두려운 줄 아십시다. 죄 두려운 줄 아십시다. 천국 가는 길 소풍이 아닙니다. 세상 등지고 내 십자가 지고 주를 따르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어정쩡하다가는 큰 시험 당합니다. 그러니가 양심의 고통이란 주님께서 이 멸망할 세상에 마음 두지 말라고 제촉하시는 채찍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의 보혈이 공로에 안심할 뿐 아니라 속히 세상을 벗어나 장망성을 떠나는 기독도처럼 참된 하늘 백성 되도록 진실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