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5 (계13:6)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5 (계13:6)
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이 시간에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는 제목으로 계속하여 “육신적인 약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있던 일인데 아이들이 숲속에서 표범 새끼를 잡아와 먹이도 주면서 같이 놀고 있었습니다. 마을의 추장이 나왔다가 그걸 보고는 놀라 “빨리 숲에다 버리지 않으면 크면 너희들을 모두 잡아먹고 말거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키웠는데 표범은 다 커서도 아이들과 즐겁게 놀면서 그렇게 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가 넘어져서 무릎에서 피가 줄줄 흐르자 표범이 제일 먼저 달려와서 안쓰럽다는 듯이 아이의 무릎의 상처를 핥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애정어린 표현이었지만 피를 맛보더니 점점 표범의 눈빛이 이상해지기 시작하여 결국 아이들 모두를 잡아먹고 말았습니다. 원래 고기를 먹는 짐승이 피 맛을 보니 본바탕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짐승과 같은 잠재력을 가진 우리 육신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그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육신은 어떤 것일까요?
18. 육신의 호소력은 대단합니다.
5절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여기 과장된 입은 개역성경에는 “큰말”로 번역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크다는 것은 어떤 영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입이 마흔두 달 동안 활동한 입이니 이것이 무엇인지 그 답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 답은 육신적인 호소력입니다.
막 8장을 보면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31절) 하실 때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리 마옵소서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32-33절) 책망하셨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말의 위력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냥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붙들고 말했습니다. 절대로 그리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승을 위해서라면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의 육신적인 감정은 대단했습니다. 주님이 가시면 안 된다는 이 생각은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 때까지도 가지고 있었고(요16:22) 이 호소력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순간까지도 그랬을 것입니다.
이런 육신적인 호소력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까지도 있었습니다. 행1:6-8에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제자들 중에 셀롯인 시몬 같은 사람들은 바로 열심당으로 이스라엘 독립을 위해 항상 칼을 품고 다녔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한 목숨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이적을 볼 때마다 항상 이스라엘의 독립을 결부시켜 생각했었고 죽은 자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칼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승천의 최후의 순간에도 그 때를 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육신의 감정에서 나오는 마음의 소리가 얼마나 큽니까? 나를 다 정복하고도 남을 만큼 그 호소력이 큽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사람이 먹고 입고 사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염려를 버리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감정도 그렇습니다. 죽음이란 육신의 옷을 벗고 천국 가는 인생 최고의 기쁜 날인데 육신적인 마음에서는 싫다고 수십 년 동안 소리를 지릅니다. 이 육신적인 호소를 다스리지 못하면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식욕은 어떤가요? 창3:6에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주었습니다(창3:6). 다른 좋은 열매가 있는 데도 선을 넘는 식욕에 대한 호소력은 큰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육신의 호소력은 나를 지배하고 도둑질이라도 할만큼 상상을 초월합니다.
19. 본능의 패역함 역시 대단합니다.
5절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여기 신성 모독이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가리키는데 이건 사람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거나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받으려는 우상적인 본능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얼마나 많은 원수들이 신성을 모독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에게 신성모독한다고 말했지만 알고 보면 그들이 바로 신성모독자였습니다.
헤롯왕을 비롯해서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신 증거와 표적을 보고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직분에 도전했습니다. 헤롯 같은 경우는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 하니까 베들레헴 아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이비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목회적인 생명을 끊어 놓는 말로서 그를 지금까지 양육하시고 기름 부으신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이기 때문에 큰 죄입니다. 이단일 때 이단이라 해야지 감정으로 정적을 이기기 위해서 함부로 하다가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그 때 하신 말씀이 막3:28-29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그뿐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을 알고도 회개하지 않고 부활의 증거를 감추고자 했습니다. 알지 못하고 예수를 죽이라고 휩쓸린 자들은 오순절에 가슴을 치며 회개했지만 이런 주모자들은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수준에 까지 오면 더 이상 구제의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신성 모독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리에 앉아 영광 받는 일 많습니다. 그리고 서로 높아지려고 하고 나를 위한 삶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접하기보다는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잘해주면 더 잘해주길 바라고 더 잘해주면 더더더 잘해주기를 바라고 나중에는 하나님 자리까지 모두 차지하고 맙니다. 이 교만이 바로 사탄죄요 신성 모독죄입니다.
사람이라는 동물처럼 괴물이 없습니다. 좀 살게 되면 사람들이 올챙이 때 생각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땅을 밟지 않고 사는 자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추앙해 주면 자신이 하늘에서 떨어진 자나 되는 줄 압니다. 제자들도 나를 내버리지 못하고 서로 높다고 길에서 다투었습니다. 이 고질적인 병폐가 우리 믿음의 성장을 막습니다. 이 악한 요소가 언제 사라집니까?
20. 이 악은 십자가에 못 박힐 때까지 계속됩니다.
5절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여기 마흔 두 달이란 이미 말씀한 대로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이 기간에 득세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 기간이 바로 악을 끝장내기 위한 준비의 과정이고, 이 기간의 끝이 바로 그 악이 끝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이 기간에 예수를 구주로 깨달아 모실 수 있었고, 나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들의 육신적인 죄악도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습니다. 이건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들의 죄 역시 거기 못 박힌 것입니다.
그런데 공생애를 암시하는 표현 중에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나, 1,260일이 있는데, 여기서는 마흔 두 달이라고 표현할까요? 여기서 달이란 밤에 뜨고 해 입은 여자가 달을 밟듯이 세속의 상징이고 달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듯이 그 사조가 자꾸 변합니다. 그리서 마흔 두 달이 사용되는 곳을 보면 대체로 악의 지배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13:5, 11:2).
다시 설명해 드리면 매일 매일 보살피시고 양육하시는 손길을 강조할 때는 1260일이라고 표현했고(계11:3, 12:6), 예수님의 제자교육에 있어서 성경에서 “때” 혹은 “비로소”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듯 단계적인 진행성을 강조한 표현입니다(계12:14, 단12:7). 그리고 마흔 두 달이란 그 후에 악의 지배가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마흔 두 달이 끝나는 날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지시고 못 박히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단9:24에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이 때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마흔 두 달 후란 바로 이런 날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아직도 그를 믿는 자들에게서 죄가 보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억할 점은 성령 충만함이 임하기 전까지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오순절에 성령 받기 전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도 실망하여 흩어지거나 두려워서 숨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이 중요합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은혜 안에 살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과 성령으로 “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말씀과 성령 안에서 체험하고 또 십자가 사랑에 대해 마음으로 감화 될 때 우리의 그 강력한 육신의 호소력과 약함과 애착심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다에서 올라온 악한 입을 가진 괴물은 바로 우리 육신의 주장과 애착과 욕망과 교만을 말합니다. 이젠 우리 거듭난 영의 호소를 들어야지 거짓된 본능의 호소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속의 악이 크다 해도 마흔두 달 후 즉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앞에서는 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를 나의 구주로 삼고 늘 기도하여 성령 충만 받아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전히 쓰실 수 있는 귀한 도구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