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3 (계 13:3)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3 (계 13:3)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이 시간에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는 제목으로 계속하여 ‘육체론“에 대해서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기원전 5세기의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인데도 왜 이 말이 유명할까요?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신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육체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육신이 보통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잘 다루지 않으면 육신생활은 물론 영적생활에 있어서도 패가망신할 수밖에 없는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계속하여 육체란 무엇일까요?
11. 강한 통제가 필요한 지체입니다.
3절에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머리가 일곱인데 그 중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됐지만 아주 죽은 것은 아니고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낫게 됩니다. 그 때부터 비로소 괴물 역할을 제대로 하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하나씩 풀어가도록 하십시다.
여기서 일곱 머리는 7이 완전수라는 점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육체 본능의 자율성을 말합니다. 본능은 가르치지 않아도 다 알고 행하는 자율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죄를 가르치지 않아도 죄를 행합니다. 그런데 일곱 중 하나가 상했다는 것은 그 특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7에서 1만 모자라도 완전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상한 것이 좋습니다. 야곱도 환도뼈가 상하고 비로소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불렀습니다. 상하지 않으면 인간은 제 맘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자율성을 억제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법이 있습니다. 양심의 법, 국가의 법, 혹은 도덕 체면과 같은 것도 있습니다. 이 법들이 육체의 자율성을 침해하여 그 일탈을 막아줍니다. 이 법들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사람이 본능대로 맘대로 산다면 그것은 동물의 왕국이지 인간 사는 세계가 아닙니다.
거짓말하고 싶어도 양심 때문에 하지 못합니다. 비윤리적으로 살고 싶어도 도덕과 체면 때문에 하지 못합니다. 도둑질하고 싶어도 국가의 법 때문에 하지 못합니다. 특히 국가의 법과 같이 강력한 법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살 수 있습니다. 사형에 대한 의견이 많지만 이 제도도 죄에 대한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5,000만 명이 육신의 감정과 욕망대로 산다면 그것이 무법천지요 지옥이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은 어느 수준에서 통제가 필요합니다. 맹수 하이에나를 다룰 때 안면 전체를 튼튼한 그물망으로 덮어씌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완악수록 더 강한 통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강한 통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가시입니다. 바울이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고후12:7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 가시가 육체의 질병이라는 말도 있고 바울을 심적으로 괴롭힌 원수들이라고도 합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것이 떠나가도록 세 번이나 주께 간구하였을까요? 그랬더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9절)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라. 하나님 두려운 줄만 알아도 경건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 깊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2. 그런데 통제가 느슨해지면 문제가 생깁니다.
3절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그 상하여 죽게 된 것 같은 머리가 낫게 됩니다. 괴물 같은 짐승이 낫는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육체의 본능의 자율성의 회복을 말합니다. 이 회복은 언제 생기냐 하면 통제가 느슨해질 때 생깁니다. 자율성이 회복되면 내 원는데로 살겠다는 것이니 이건 영혼의 재앙입니다.
정한 수위를 벗어나 바다에서 올라왔으니까 그 자율성이 살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도 무딘 상태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양심이 화인을 맞았다고 합니다. 불도장을 맞은 부분은 감각이 없음과 같습니다. 도덕도 해이한 상태입니다. 환경도 자유로워졌습니다. 예를 들면 물질적 여유도 있습니다. 돈도 많아지면 타락할 기회도 능력도 더 많아지고 커집니다.
알코올 중독이 되면 더 통제가 불가능해집니다. 간섭해 주는 부모나 가족이라도 떠나면 더 심각해집니다. 자기 세상이 됩니다. 혹은 성경 보지 않거나 교회 밖으로 나가면 더 자유로워집니다.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하고 하루는 쉬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 얼마나 귀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치는 신앙도 없어졌습니다. 혹은 먼 나라로 가면 더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서 얼굴이 잘 알려진 사람들이 일탈을 꿈꾸려고 안면이 없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그래서 억압에서 해방되자면서 기존 종교나 진리나 법이나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 윤리 제도 등에 대항하는 포스트모던 사상이 지식인들 층에서 퍼지고 있습니다. 히피도 거기에 속합니다. 이런 일은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시편2:3에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 그들은 그것들이 자신들을 보호하는 울타리로 알지 못하고 억압으로만 이해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혹은 괴롭던 질병도 사라지고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도 없다면 하나님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근심거리도 사라지고 편해지면 우리는 물을 만난 것처럼 타락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감사하다가 점점 신앙이 무디어져서 형식화되다가 아주 멀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에게 자유란 자유가 아닙니다.
죤 번연이 쓴 불후의 명작 천로역정을 보면 기독도가 천성길을 가다가 언덕 아래 내려가니 곁길에서 세 사람이 누워 깊이 잠들었는데 그 발에는 착고가 채워 있었습니다. 그 첫째의 이름은 천박이요. 둘째는 나태요. 셋째는 자만이었습니다.
기독도는 저들이 그렇게 누워있는 것을 보고 저희에게 나아가서 깨워 줄 수 있을까 하여 외치기를 “당신들은 돛대 위에서 자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아래는 밑 없이 깊은 죽음의 바다가 있으니 깨어 일어나 여기서 떠나갑시다. 그리고 만일 원하시면 내가 그 착고를 벗도록 도와 드리리다.” 하면서 "지금 사탄이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으니 깨어 근신하시라" 고 경고하지만 그들은 귀찮아만 합니다.
그러면서 대답하기를 천박이는 “나 보기에는 위험한 것이 없는데?”, 나태는 “좀 더 자자.”, 자만은 “제 앞이나 쓸지 남의 일은 상관 마” 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평안한데 무슨 근신하여 신앙생활이냐. 귀찮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도가 잃었던 책을 찾으려고 다시 돌아왔을 때 저들은 사자에게 당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즉 사탄의 시험으로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시험 들어 다 자기 잘못인 줄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세상으로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이는 교인과 교회와 관련된 시험이 들어 사탄이 대못을 박아 다시는 돌아갈래야 갈 수 없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영적 위기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입니다. 그래서 살전5:3에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심판하러 오시는 예수님 그 때 오셔요. 꼭 재림이 아니더라도 근신하지 않고 안일무사 방탕하다가는 갑자기 망할 날이 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5:31-34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했습니다.
13. 육신은 너무나 간사해서 고난이 없으면 제 멋대로입니다.
3절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육신은 양심을 비롯해 여러 가지의 통제를 벗어나면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습니다.
여기 온 땅이 따랐다 했는데 여기서 온 땅은 육신적인 마음입니다. 즉 양심이 무디어지면 그 때는 전 인격이 아무런 가책도 없이 점점 세상을 따라서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백했습니다.
어느 목사의 딸이 불신자와 연애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극구 말리는데도 그 딸은 듣지 않고 기어이 자신의 뜻대로 결혼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10여 년 동안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교회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녀의 외아들이 병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깨달은바도 없이 불신앙으로 살았습니다.
결국 그 아들이 죽자 그녀는 그제야 교회를 찾아가서 목사에게 하소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듣다못해 목사가 한 마디 했습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은 그 정도 얻어터져야 10년만에라도 교회에 나오는 걸 어떡합니까?" 좋은 말로 위로하고 싶었지만 줄곧 못된 말로 원망하는 것을 보고 꾸짖었습니다. 그 여인은 그제야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사야는 사8:12-13에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도 영혼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지옥불에 던지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유롭다고 다 좋은 것 아닙니다. 풍족하다고 다 좋은 건 아닙니다. 방종은 자유보다 더 나쁩니다.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살 동안 말씀의 통제를 받으며 산다는 것을 행복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 울타리를 벗어나면 우리를 잡아 먹으려는 맹수들로 들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 육체는 가장 통제를 받아야 할 지체요, 때론 고난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여 항상 깨여 근신하며 신앙생활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