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일곱째 천사의 나팔 6 (계 11:19)

nam씨 2023. 10. 28. 14:43
일곱째 천사의 나팔 6 (계 11:19)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이 시간에 일곱째 천사의 나팔 다섯 번째 시간으로 “내가 죽어질 때”라는 내용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어느 주일학교에서 교사가 어린이에게 물었습니다. "천국을 어떻게 가죠?" 교사는 예수 믿음으로 간다는 답을 기대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죽어야 갑니다." 정답일까요? 물론 죽어야 가죠. 그러나 예수 믿고 죽어야 갑니다.

 
그런데 육체의 죽음 말고 더 귀한 죽음이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기쁨으로 따르는 자아의 죽음입니다. 즉 내가 죽어야  하나님을 바로 모실 수 있고, 내 마음의 천국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지금은 신약시대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 핏 공로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히10:19-20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휘장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그런데 본문 보니까 하늘의 지성소가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언약궤가 보이는 걸 보니 지성소가 열렸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이미 예수 안에서 열린 문인데 왜 일곱째 천사의 나팔에 하나님의 성전이 열릴까요?
 
이처럼 우리 마음의 성전에도 열려야 할 휘장이 있다는 것이며 진실로 은혜를 받을 때 휘장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 휘장은 바로 내 자아라는 휘장입니다. 내 맘대로 하려는 것이 자아입니다. 입으로는 주여주여 하면서도 내 뜻대로 하는 내가 주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 자리에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주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마24:15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했던 예언처럼 우리 마음 상태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우리가 보혈 공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만 이 교만 가지고는 은혜 받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라져 우리 영혼의 지성소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순종하는 자식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5:31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했고, 고전9:27에서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고후10:4-5에서는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겸손하면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내 마음의 휘장이 사라져야 합니다. 죄의 휘장, 불신의 휘장, 교만의 휘장, 자행자지하는 휘장, 불순종의 휘장, 이 휘장이 사라져 마음의 지성소가 활짝 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내가 죽어질 때 오는 은혜란 무엇일까요?


1. 언약이 실질적으로 회복됩니다.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습니다. 이것은 언약의 회복을 말합니다. 언약궤의 여러 명칭들이 있습니다. 증거궤 법궤 여호와의 궤 언약 등인데 여러 명칭 중에서 왜 언약궤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과의 언약을 강조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실 때 십계명을 중심으로 언약을 체결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출19:5-6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그러니까 이 언약은 바로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백성,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언약궤가 보였다는 것은 이 언약이 실질적으로 회복된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관계적 회복입니다. 언약이란 혼인 언약과 같아요.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신랑 삼고 예수만 사랑하기로 했지만 고멜과 같이 세상 사랑하고 절개를 지키지 못할 때 법적으로만 신부였지 진정한 예수 품안의 신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은혜로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사랑과 생명을 누리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인격적인 관계가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후6:14-18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이렇게 진실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주로 삼아 거룩하게 될 때 우리의 영적 삶은 달라집니다. 그것을 호14:4-7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에 언약궤가 보였다는 것은 언약의 회복을 의미하며, 이는 아버지로서의 언약을 다하시고 신랑으로서의 언약을 다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호14:4의 말씀처럼 우리의 반역을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로 삼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내가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 진정한 언약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내가 죽어질 때 경건한 마음이 됩니다.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이 모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하실 때 시내산의 두려운 모습입니다. 출19:16을 보면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히 12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히12:18-21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이것이 시내산의 환경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시내산의 두려운 환경이 나타날까요? 우리는 은혜 아래 있는 성도가 아닙니까? 히12:22-24에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는 이런 환경을 스스로 조성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왕이 아무리 너그러워도 백성들은 왕을 쉽게 알지 않고 존경하고 예절을 다해 경외함으로 받들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경외라고 하고 경건이라고도 합니다.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있더라 했지 없더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음에 두려운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경건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기에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자행자지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결정할 때도 내 감정대로 내 생각대로 함부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주관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감정도 그렇습니다. 지나치면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두려워 가슴 치며 회개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져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의 지성소는 예수님의 공로로 활짝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되고 속죄의 공로 믿고 담대히 나가면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주가 되고 하나님 되어 교만하다면 어찌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자아의 휘장도 갈라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겸손과 경건함 가운데 주를 섬겨 하나님께서 온전히 언약을 회복하시고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로 함께 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