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두 증인 7 (계 11:10-11)

nam씨 2023. 9. 1. 21:10

두 증인 7 (계 11:10-11)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이 시간에 “두 증인”이라는 제목입니다. 본문은 두 증인의 죽음을 기뻐하지만 삼일 반 후에 부활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명칭이 바뀝니다. 두 증인에서 두 선지자로 바뀝니다. 인물은 동일한데 명칭이 바뀝니다. 왜냐하면 본 절부터 모세와 엘리야의 특성이 더 강하게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선지자인줄 아는데 모세도 선지자입니까? 모세가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로 인상이 강하다 보니 선지자임을 망각하기 쉬운데 신18:18을 보면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란 말씀에서 모세도 선지자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만 되겠습니까?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은 선지자 중의 선지자입니다. 신34:10에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라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증인에서 선지자라고 한 더 큰 이유는 선지자의 특성과 같이 증거를 넘어 성령의 탄식하심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령께서 탄식하심과 그 결과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요?


1. 마음에 심한 회개의 고통이 일어나게 됩니다.


10절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했습니다. 모세는 땅의 사람 바로 왕과 그 나라를 괴롭게 했습니다. 바로 왕이 강퍅하여 차례로 열 가지 재앙이 내려졌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 바로와 그 나라에 퍼부어졌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이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아합 왕과 그 아내 이세벨이 여호와의 종들을 죽이고 바알신을 섬기게 하자 내 말이 없으면 이 땅에 우로가 없으리라고 선언하여 무려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모두가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상18:17에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18절)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땅에 거하는 자란 우리 안에 육신에 관심 두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괴롭다는 것은 회개의 심정을 말합니다(사58:5). 성령이 역사하시면 이런 성령의 탄식이 죄인의 마음을 진동합니다.


이런 죄에 대한 성령의 탄식을 흔히 말하는 회개의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뉘우침이 있습니다. 애통이 있습니다. 슬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탄식은 우리에게 회개를 불러옵니다.


그래서 롬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고후7:10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2. 성령의 탄식은 진정한 즐거움과 기쁨을 줍니다.


10절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모세와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그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원수들에게 미움을 받고 죽이기 위해 생명을 찾는 대상이었습니다.


출10:28에 “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바로 왕도 모세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이 두려워 죽이지 못했지 수없이 죽이고자 했을 것입니다.


아합도 계속되는 가뭄 속에서 회개는커녕 엘리야의 목숨만 찾았습니다. 그러나 두 선지자가 원수에게 백 번이고 죽이고 싶은 대상이었을 뿐 죽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를 암시하는 내용 속에 두 사람은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자 괴롭힘을 받았던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며 축하합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부림의 기쁨이 나타난 것입니다.


에9:19에 “그러므로 시골의 유다인 곧 성이 없는 고을고을에 사는 자들이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 했고 22절에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탄식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회개할 마음이 있을 때 회개해야 합니다. 진실로 회개한다면 성령의 탄식은 우리에게서 종적을 감추지만 감추는 대신 그 마음에는 기쁨과 행복이 밀물처럼 밀려오게 될 것입니다.


3. 성령의 탄식은 이제 생명의 성령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11절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두 선지자들은 삼일 반 후에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3일 반이란 완전수 3에 반은 보충수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죽음을 말합니다. 완전히 죽어야 살아나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역시 이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종말은 특이했습니다. 먼저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왕하2:11에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이 엘리야의 승천은 장차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란 점에서 그가 죽지 않고 승천하지만 이미 죽었다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실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승천은 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도 죽지만 아무도 그의 시체를 보거나 무덤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백성들이 그를 우상으로 삼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유1:9에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했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공개매장을 하자. 모세의 지위에 걸맞게 아는 장소에 위대하게 무덤을 꾸미자고 한 것입니다. 이 기록을 볼 때 모세의 장례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34:5-6에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죤 칼빈도 그의 유언 때문에 그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보다 더 초라하다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은 사라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잘 죽고 잘 매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은혜 안에서 영원히 산 자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죄인에게 탄식의 영으로 임하신 후 변화된 그 심령에 생명의 영으로 다가오십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얻는 회개입니다(행11:18). 이방인도 진실로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와 예수 믿으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탄식하시는 역사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4. 그 뿐 아니라 삶과 능력으로도 다가옵니다.


11절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발은 행함의 상징입니다. 또한 발은 능력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승리자는 발로 원수의 머리를 밟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면 계1:15에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이 말씀은 원수를 짓밟으시는 강하신 발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령의 탄식으로 진실로 회개한 심령은 기쁨과 즐거움과 생명 그리고 삶의 변화와 능력과 권세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롬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했습니다.


5. 성령께서는 우리를 경건하게 하십니다.


11절 마지막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두 선지자가 죽음에서 살아나자 구경하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장면입니다. 구경꾼이 변하여 경건한 자가 됩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아니라 구경꾼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말하지만 성령을 모릅니다. 성령으로 인한 마음에 감동도 생명도 능력도 권세도 삶도 없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기 전에는 구경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마음의 경건이 있습니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떨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경건합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면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셔서 우리를 경건한 하나님의 참 백성을 삼으시려고 성령의 탄식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탄식은 회개의 영으로, 생명으로, 기쁨과 즐거움으로, 능력과 권세로, 경건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말씀과 성령을 더욱 사모하여 온전히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경건한 참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