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두 증인 6 (계 11:8-9)

nam씨 2023. 8. 25. 21:32

두 증인 6 (계 11:8-9)


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시간에 “두 증인”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두 증인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 두 증인의 의미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두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라는 그 일생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신다는 점에서 귀한 성령의 사역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증인이 죽고 다시 살고 이건 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동안 성령께서 예수를 증거하시는 외적사역이 주가 되었지만, 이제는 성령의 역사하시는 양상이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즉 이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어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고 함께 하늘에 앉히심을 받은 이 은혜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두 증인의 삶과 죽음과 승천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기서 더 몇 가지 확신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17.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8절에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여기 큰 성 길은 문맥으로 볼 때 세상길을 말합니다. 마치 요나가 40일 후면 멸망할 앗수르 니느웨성을 큰 성읍이라 함 것과 같습니다. 이 큰 성읍이라는 말이 요나서에만 4번이나 나옵니다. 니느웨는 세상의 상징입니다. 바벨론성도 큰 성입니다. 모두 세상을 나타내는 성들입니다.


왜 큰 성일까요? 규모가 커서만 큰 성이 아닙니다. 이 지구에 하나님에 대한 거대한 배교가 있었고 또 세상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크게 보였고 또 엄청난 일을 저질렀으며 그리고 빠져나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기가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구원 받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시체가 그 큰 성 길에 있었다. 이 길은 세상길입니다. 이 길은 멸망의 넓은 길입니다. 그래서 마7:13-14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큰 길에서 죽었다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 우리가 세상과 상관하지 않고 구원 받았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갈6:14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예수 공로로 죄악의 세상 길에서 죽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최고의 이별은 죽음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고 세상도 우리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베드로는 벧전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도 롬6:11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렇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예수 안에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과 그 의에 대해서는 산자라고 여기라. 그런데 여겨도 혹시 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현실보다 진리를 더 의지해서 죽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하신 일, 즉 진리에 서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안 죽었는데 죽은 줄로 여겨서 죽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죽이는 것 아닙니다. 안 죽어서 죽기 위해서 죽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죽었다고 말씀하기에 죽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었다고 자꾸 체면 걸 필요 없어요. 진리와 체면술은 달라요. 자꾸 최면을 걸 것이 아니라 현재는 펄펄 살아 있어도 성경을 의지하여 문제가 없이 해결된 사람처럼 문제 시하지 않는 것이 진리에 서는 첫 걸음입니다.


그러므로 악이 역사할지라도 조금도 문제 시하지 말고 태연한 마음으로 이니 된 자로 생각하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더 쉽게 설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는데 마치 잘라진 도마뱀의 꼬리가 꿈틀거릴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건 교육학적으로도 의미 있습니다. 문제를 삼으면 삼을수록 더욱 심각해집니다. 예수 안에서 문제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시체가 큰 성 길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세상과 상관 없이 죽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8. 성도는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8절 하반 절에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여기 큰 성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세상을 이렇게 오묘하게 표현할 수가 있습니까?


여기 큰 성을 알려주는 3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큰 성 = 소돔 = 애굽 =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그렇다면 이 큰 성은 어딜까요? 바로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이 세상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소돔도 애굽도 모두 영적으로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어디라. 계시록이 영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소돔이 주는 의미는 무얼까요? 소돔은 타락의 대명사입니다. 창세기에도 나오지만 소돔 사람들은 아무나 잡고 상관하려고 합니다. 이성끼리는 물론 동성끼리도 잡고 상관하고자 합니다. 여기 상관이란 성관계를 말합니다.

 

혹시 마음에 그런 죄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그러나 성도는 이제는 예수 안에서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알면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이미 해결된 문제입니다. 그걸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성애나 동성애에서도 해방되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애굽입니다. 애굽의 특징은 종살이하게 하고 놓아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종은 바로 죄의 종살이입니다. 요8:34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이처럼 죄에서 벗어나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여기서도 해방되었단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롬6:17-18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해방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종의 종일지라도 예수 안에서 해방된 자라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습니다. 주님이 못 박히실 때 나도 못 박힌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전에 많이 강조했으므로 이 정도로 넘어갑니다.


19. 성도가 이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9절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시체를 장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기간이 바로 사흘 반이었습니다.

 

이 시간은 주님의 무덤에 있는 시간보다는 약간 깁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 제 9시 즉 오후 3시에 운명하셨고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으니까 무덤에 있던 시간이 40시간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시간적으로는 사흘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사흘을 가득 채우고도 반 날입니다. 왜 차이가 있을까요? 그것은 사흘이니까 예수님의 고난의 상징이 되면서 또 다른 의미를 부가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온전한 죽음의 적용입니다. 여기 사흘 반은 온전한 죽음을 가리킵니다. 즉 사흘 3은 완전수에, 반은 보충수입니다. 완전수만 해도 완전하거니와 보충까지 했으니 더욱 완전합니다.


여기 완전이 강조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온전히 그리고 더 진지하고 온전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완악한 속성 때문에 그러지 않더라는 말입니다. 먼저는 몰라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와 함께 내 죄가 죽어 해결되었다는 복음을 모릅니다. 혹은 복음을 들었지만 자기에게 적용할 줄을 모르기도 합니다.


다음은 알아도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여 온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완악한 마음의 상태를 기록한 말씀이 바로 9절입니다.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여기 백성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의 사람들은 좁은 의미에서 우리 인격 전체의 여러 속성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무지하고 완악해서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은 나를 장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어도 장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여 우리가 지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받아들이는데 이것이 곧 장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곧 장사입니다.

그래서 골2:12에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는 믿음이 필수입니다. 믿음과 세례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의식적 세례를 받았어도 믿음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혹은 믿음 가지고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적인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그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영적 실제는 바로 세례와 그 세례적인 믿음으로서 누립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한 번 받지만 일생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았다는 세례적인 믿음을 한순간도 잊지 말고 그대로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 세례적인 믿음이 우리에게 영적 실제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는 우리를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복음이 온전히 믿어지고 더 이상 복음진리 앞에 머뭇거리지 않고 기쁨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실제를 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늘 사모하고 기도함으로 더욱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