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요한계시록

믿음 측량 2 (계 11:1-2)

nam씨 2023. 7. 15. 11:42

믿음 측량 2 (계 11:1-2)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이 시간에 “믿음 측량”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 읽진 못했지만 계11:1-13의 두 증인에 대한 환상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각 개인에게 적용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자세히 말씀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성령은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각인에게 집행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했는데 제단의 과정이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그 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의 과정이라면, 성전은 씻음 받고 들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니까 성화의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또 한 성전은 하나님 나라의 예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잘할 때 거룩함과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그럼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2절) 했는데


1. 성전 바깥마당은 뭘까요?


성전 바깥마당을 이방인의 뜰이라고 합니다. 이방인들도 이 뜰까지는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 바깥마당에까지 온 이방인은 일반 이방인과는 다릅니다. 이들은 로마군도 바벨론군도 앗수르군도 아닙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성만이 아니라 성전까지 헐었지 바깥마당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신령한 관점에서 접근하란 말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이들은 교회를 출석하지만 아직 이방인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지만 아직도 예수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는데 이르지 못하고 구원의 확신도 없으며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주님을 떠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자랄 수 있도록 하나님 곁으로 가까이 나온 예비후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아직 진리에 이르지 못했지만 진리에 이르도록 양육 받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 출석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로마의 백부장이 유대에 파송되어 와 살면서 유대의 친구들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배워 결국 성령의 계시로 베드로에게서 복음을 듣고 예수 만난 것과 같습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는 자들은 장차 구원함에 이를 예비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불신자들을 전도해서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도 제자만 기르신 것이 아닙니다. 대중사역도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고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전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고 배고플 때는 떡도 먹여주셨습니다. 육체에도 구원을 베풀었습니다.

 

우리 지상에 있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육체에도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교회가 본질 아닌 것을 힘쓴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의 성전 밖에 이방인들도 올 수 있었고, 성전 울타리가 낮아 성전 뜰에서 하는 일을 밖에서 다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불신자들이 올 수 있는 선교적 차원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단은 하나님의 성전 바깥마당에 이방인들로 차게 해야 합니다.


2.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 마흔 두 달은 한 달을 30일로 계산하여 3년 반입니다. 이 기간 동안 이방인들에게 짓밟힘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3년 반이 지나면 이방인의 짓밟힘에서 완전히 해방을 얻을 것이라는 힌트입니다.


여기 이방인은 앞에서 언급했듯 일반 이방인도 아니고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뭔가 귀한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말씀하신 것인데, 즉 이것은 교회의 양육을 받는 어느 날 불신자가 아니요 신자가 되고 그래서 마음에 이방의 속성이 사라질 날이 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3년 반 후에는 거룩한 성에 대한 도전을 그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자꾸 세속이 침범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거룩에 도전하는 세속적인 이방의 속성을 가진 심령이 3년 반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하나님께서 불신앙을 척결하여 주시므로 불신앙의 시대를 마감하게 하십니다.

 

그 이전에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3년 반 공생애가 끝날 즈음 예수님께서는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신앙고백적 질문을 하십니다. 그 때까지도 제자들은 많은 메시아적 표적을 보면서도 뉘신고 했었습니다.


그 때 마16:16-17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의 삶을 끝내고 하나님의 자녀의 구원 받은 반열에 들어온 것입니다. 신약의 이방이란 예수 밖의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3년 반이 걸렸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성을 짓밟는 이방의 속성을 가졌을지라도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과정과 같은 은혜로 우리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믿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3. 그런데 마흔 두 달의 결정적 시기가 있습니다.


앞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말했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만 받으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 우리의 모든 죄와 옛사람과 저주까지도 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로 그 때가 3년 반에 해당할 뿐 아니라 거기서 우리의 옛사람과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의 새 사람으로 탄생합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거룩한 성을 짓밟는 우리의 악한 속성이 끝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혹시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여러분의 마음의 성을 스스로 죄악의 구둣발로 짓밟는다면 이제 주님의 십자가 공로 아래 나오시기 바랍니다.

 

3년 반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공로 말고 내 의와 힘으로는 결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많아도 내가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의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믿어 적용함을 몰라 죄악을 처리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이 죽으실 때 나의 죄도 죽었다고 믿는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새 사람을 경험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구원이 무엇이며 의가 무엇인지 체험하게 됩니다. 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자만이 바울이 불렀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기자는 노래합니다. 시65:4에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성전 뜰 안에 있습니까? 뜰 밖에 있습니까? 뜰 밖의 이방인이라면 뜰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교회의 양육 잘 받아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여 하나님의 성전의 영역에서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