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직분 2 (계 10:9-11)
복음의 직분 2 (계 10:9-11)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이 시간에 “복음의 직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복음전도자에게 가장 큰 찬사를 보냈는데 그 뿐일까요? 롬3:1-2을 보면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복음을 알고 복음을 책임졌다는 것만도 위대한데, 그 복음을 진정 생활화하고 또한 전한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래서 천사도 흠모할 직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복음의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4. 복음의 진리를 더욱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9절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요한은 하늘의 음성을 듣고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아주 적극적인 자세를 보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달라 했나요? “작은 두루마리” 작은 두루마리가 무엇일까요?
보는 관점에 따라 어떤 이는 요한계시록이라, 혹은 천사의 손에 있었다는 점에서 내가 전할 말씀의 힌트, 그런데 작다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그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작다는 의미가 자기를 낮추신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기 예수로 작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작은 가정에서 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신 곳도 유대의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풍체도 없으시고 흠모할만한 육신적인 조건이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갈릴리 어부거나 세리와 같은 작은 사람들이었고, 복음 전도의 대상도 작고 낮고 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백마를 타지 않으시고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령도 더 되는 하늘 군대를 오게 할 수 있었으나 아주 작은 모습으로 작은 종들에게 잡히셨고 하찮은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때도 제자와 여인 등 작은 무리가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작다는 것은 낮아지시고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사53:2-4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런 의미에서 작은 책이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고난의 쓴잔을 상징하는 대접 재앙을 앞에 둔 예고라는 점에서 문맥에도 어울립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학식이 풍부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다 해도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나를 위해 죽으신 최소한 이 십자가 복음만큼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더 알기를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5. 십자가 복음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9절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요한이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갖다 먹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갖다 먹어버리라는 것은 깊이 묵상하여 내 뼈가 되고 살이 되고 마음이 되고 사상이 되고 꿈이 되게 마음을 품으라(빌2:5)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핵심도 십자가였습니다. 고전2:1-2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했습니다.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과 이 십자가 복음을 늘 묵상해야 합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빌3:1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하면서 18절에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죽으심의 공로를 믿음으로 다가오는 은총 뿐 아니라 그 고난의 사랑을 묵상할 때 우리의 믿음이 사랑 안에서 그만큼 성숙해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 하나님께서 더욱 함께 하십니다.
일평생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묵상했던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그의 만년에 알베르노 산 기도처에서 장기간 금식하며 간구한 것도 역시 고난의 묵상이었었습니다. 그는 “주님, 두 가지를 구하옵나니 죽기 전에 제 영혼과 육체가 당신의 십자가 고난을 맛보게 하시고,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가질 수 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전해온 바에 의하면 프란시스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오상의 흔적을 실제로 체득했다고 합니다. 프란시스가 그토록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된 것은 그가 일생토록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묵상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 작은 책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이라 하여 예수님의 고난을 40일 동안 묵상하는 전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순절이 너무 형식화되어 40일 동안에도 먹을 것 다 먹고 할 것 다하며 외식만 늘어가고, 새로운 율법이 되어 정죄감만 늘어가니까 우리 기독교에서는 칼빈이래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빼고는 특별하게 지키지 않고(칼빈의 기독교 강요 4장 19-29)" 예장 84회 총회에서도 그렇게 가결한 바 있습니다.
마치 유대 장로들의 유전처럼 사람이 만든 계명이 되고 말았단 말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더 올바로 잘 섬기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지만 외식화되므로 막7:6-7에 주님이 무엇이라 책망하셨습니까?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그렇게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형식적이지 말자는 것이지 십자가 고난 자체를 묵상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므로 늘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6. 십자가 복음은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말씀입니다.
10절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왜 입에는 꿀과 같이 달까요?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다는 그 말씀처럼 은혜로운 말씀은 없기 때문입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보다 더 달콤한 말씀은 없습니다. 이 말씀이 없다면 제가 주님을 떠났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 사랑 때문에 감동 받고 이것 때문에 감사하고 이것 때문에 찬양하고 이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이것 때문에 우리가 낮아지고 겸손하고 충성하게 됩니다.
미국의 흑백갈등이 깊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기차에서 백인과 흑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백인이 칼을 던져 흑인을 죽이려 할 때 옆에 있던 백인 목사가 손을 들어 칼을 막아주었습니다. 칼은 목사의 손에 꼽혔고 피가 낭자하게 흘렀습니다. 싸움은 멈추어졌고 흑인은 목사의 희생으로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고마움을 느낀 흑인은 일생동안 그 목사의 곁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종종 일에 싫증이 나면 흑인은 불평과 원망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목사는 칼 맞은 자신의 손을 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흑인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었는데 그 손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한 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며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한 대속의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에서는 쓴 이유는 뭘까요? 이건 꿀벌을 가지고 한 비유인데 마치 꿀벌이 꿀을 먹은 후에 집에 돌아가서 토하지 않을 수 없듯이 십자가 복음은 먹고 토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은혜의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그 복음을 진정 깨달은 자는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나를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드리고 그를 위해 살며 그 사랑을 본받아 이웃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이것이 토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고 체해서 토해보셨지요. 토하기까지 얼마나 답답하고 매슥거립니까? 어린이는 장이 짧아서 쉽게 토하지만 어른은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체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토할 듯 말 듯 그 고통이란 말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위한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진정 깨달았다면 그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고후5:13-15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하보다 더 귀한 예수의 복음을 알게 하시고 천사도 흠모할 십자가 복음의 직분을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더 알고 더 사모하며 묵상하십시다. 진실로 십자가 사랑을 아는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무엇보다 십자가 복음을 알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복음을 날마다 묵상하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