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자 1 (계 10:2)
하나님의 사자 1 (계 10:2)
2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이 시간에 “하나님의 사자”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자가 되고 싶습니까? 성경은 그걸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기 천사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여기 천사는 마지막 일곱째 나팔을 예고하는 천사라는 점에서 이 천사의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의미가 대단히 큽니다. 즉 마지막 나팔로 변화될 즉 나는 사라지고 예수만 나타나는 거룩한 성도 즉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예시할 뿐 아니라, 사명면에서도 힘센 천사니까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려면 어떠해야 합니까?
1. 성경을 보는 신령한 눈이 열려야 합니다.
2절에 “그 손에는 펴 놓인” 그랬습니다. 그의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었는데 닫힌 책이 아니라 펴 놓인 책이었습니다. 여기 펴졌다는 것은 단순히 펴졌다는 의미를 넘어 성경을 이해함을 말하고 나아가 그 은혜로움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눅 4장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증거할 때 책을 펴신(17절) 다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절) 하시며 설명하실 때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신령한 눈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육신의 눈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에 성경을 모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성경을 문서설 편집설 등 문화적 산물로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성경을 부정합니다.
바울도 열린 말씀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고후3:14-16에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즉 예수 복음으로 해석하면 열린 책이 됩니다.
즉 구약을 문자대로만 해석하면 대부분 이스라엘의 율법과 예전과 역사이지만 신령한 의미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우리의 삶을 지도하는 영적 지도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 역시 인봉 되지 않은 열린 책입니다. 그런데 난해한 책으로 생각하고 있음은 슬픈 현상입니다. 그 원인 역시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눈으로만 보고 복음으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자료를 한 마차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예수 복음이라는 신령한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면 성경은 열린 책이 아니라 덮힌 책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을 예수로 풀면 다 풀린다고 말한 것입니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계시록이든 아가서든 예수로 풀면 모두 주옥같은 복음의 진수로 가득합니다. 이는 재주 많은 사람의 공교로운 솜씨가 아니라 당연히 존재해야 할 복음의 중요한 주제들이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구약을 해석한 것이 신약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해석할 때 신약이 나와야 합니다. 복음이 나와야 합니다. 신약은 구약의 결론으로 나온 새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일차는 성경을 여러 관점에서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그 문자적 배경을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전할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완성된 모습으로 주시지 않습니다. 점점 더 밝게 깨달아지는 은혜로 다가오게 하십니다.
그래서 벧후1:19에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벧후1:20-21)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변할 수 없고 신학의 틀을 벗어날 수 없지만 그 해석은 더욱 풍부해져야 합니다. 역사속에 하나님의 종들이 잘 정리해 주셔서 지금 대단히 밝지만 더 밝고 더 정확하고 더 풍부하고 더 적용하기 쉽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성서신학적으로 더 발전해야 합니다. 더 복음을 생활화하도록 해야 합니다.
가령 신앙인들이 선행만 해도 너무 서툽니다.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소문 내셔서 죄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시는데 왜들 모르게 하는 것만이 능사인 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선행입니까?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나타내신 선행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할 때는 언제든지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정치인들도 그렇습니다. 기독정치인들이 신앙을 적용하려 해도 너무 서툽니다. 그들이 다윗처럼 세상에 나가 나라를 위해 반듯한 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신학도 발전시켜야 합니다. 각인의 구체적 삶에 능수능란한 복음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더 연구할 뿐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열린 책으로 어디서나 하나님의 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받아야 합니다.
2절에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했습니다. 힘센 천사가 손에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 책을 들고 외쳤습니다. 여기 작은 책이 무엇일까요? 여기 작은 책이란 일반적으로 계시록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어떤 관점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이 작은 책인 근거가 무엇입니까? 계시록이 큰 책이지 왜 작은 책입니까?
학자들이 선지서를 대선지서와 소선지서로 분류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 기준은 길고 짧아서가 아니라 얼마나 복음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 있느냐 따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시록이 복음적 성격이 적어서 작은 책입니까? 그와 반대로 복된 책이므로 오히려 복음적 성격이 충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유대의 고을 베들레헴이 작지 않는 것은 메시아 예수님이 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작은 책은 천사의 손 안에 잡힌 책이라는 본문의 문맥 그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두루마리가 손에 잡혀 있습니다. 이 모션은 내가 전할 메시지를 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내 맘대로 쥡니까? 요3:27에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진정한 메신저가 되려면 하나님께 받은 이거다 할 수 있는 메시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 쥘 수 있는 메시지가 있어야 중구난방하지 않고 비로소 바로 전달하고 청중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힌트를 주시고 더 묵상하면 더 풍성한 말씀으로 허락해 주십니다.
그래서 마10:19-20에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자는 이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의 힌트를 받아야 합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면서도 전해야 할 말씀이 잡히지 않아 한 주간 내내 몸부림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고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전할 말씀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초조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두루마리를 쥔 천사의 모습처럼 한 문장으로 쓸 수 있을 만큼 무엇을 전해야 할 것이 분명한 메시지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하나님께 무슨 말씀을 전할지 여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강단에 선 대리자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이거다 할 수 있는 우리 손에 쥔 말씀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3. 거룩한 승리의 복음에 선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했습니다. 여기 밟는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여호수아에게 네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다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는데 이 역시 승리를 암사합니다. 고고학적 부조에 나타난 대로 고대 전쟁에서 승리자는 패배한 나라의 왕을 발로 밟은 모습으로 승리를 표시했습니다.
수10:24에 “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하매 그들이 가까이 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 그러므로 밟는다는 것은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다는 세상이요, 땅은 육신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세속과 육체의 탐욕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과 육체는 불과 나비 격으로 서로 만나서는 안 될 사이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발로 밟았다는 것은 이김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세속과 육신의 정욕을 못 이기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능력의 사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역의 기초는 거룩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오른발과 왼발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오른발은 뭐고 왼발은 무엇일까요? 다른 성경이라면 넘어가지만 계시록이기 때문에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 하나 하나 상징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창 48장에 우수와 좌수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우편은 힘 축복 권세 능력 등을 뜻했고, 좌편 역시 그와 같지만 우편보다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족으로 바다를 밟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강한 개념입니다. 즉 바다가 세상이라면 성도는 예수 안에서 세상에 대해서 온전히 죽은 자요, 세상 역시 우리를 향해 죽은 자입니다. 성경을 말하기를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죽었고, 세상을 사랑함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고 하셨듯 아주 강합니다. 그러니까 세속에 대해서 철저히 선을 그어야 합니다.
그런데 좌족은 우족과 비슷하나 그 의미가 조금은 다릅니다. 즉 우리의 육체는 우리가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잘 길들여서 활용해야 할 사역의 도구이지 아주 처리해 버릴 성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세속과 똑 같이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즉 건강하게 관리하되 아주 죽이지 말고 날마다 나를 쳐서 길들여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과 육신을 잘 다스리는 자만이 하나님의 귀히 쓰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면 힘을 잃고 맙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 사람이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힘센 천사 즉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능력을 입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복음의 신령한 눈으로 항상 성경을 보고, 무엇을 전할지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받으며, 그리고 세상과 육신을 이긴 거룩한 승리의 복음에 굳게 서서 이 땅의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군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