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죄인이 어디에 서리요 (벧전 4장 12~19절)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죄인이 어디에 서리요 (벧전 4장 12~19절)
부활절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달 암송 말씀,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라는 말씀 속에서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합니다. 물론 승리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환난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지만, 환난 그 자체는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성경 곳곳에서는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은혜를 주신 것은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 4:13)는 말씀 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고난이라는 단어는 인생 곳곳에 지뢰밭처럼 무수히 깔려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승리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환난과 고난을 이겨 낼 수 있다고 해서, 과연 현실 적인 고난을 즐기면서 이겨 낼 수 있을까요?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으며, 특히 아시아에서 얼마나 심한 고난을 당했는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후 1:8)는 표현까지 했습니다. 믿음의 대 선배인 사도 바울 조차도 고난이라는 육체의 고통 앞에서는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난이라는 장벽을 반드시 넘어가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후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고난과 환난 가운데서도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알기에, 우리는 고난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와 후서는 신약 성경 중에서 ‘고난’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복음서 전체 속에 ‘고난’이라는 단어가 13번 나오는데,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고린도전, 후서 에서만 15번의 ‘고난’의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제외하고 계산해 보면 베드로전, 후서에 나오는 ‘고난’의 분량이 무려 30%나 차지 합니다. 그만큼 베드로전, 후서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가지고 참아내며 승리하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부활절 전이든, 부활절 이후 이든 우리의 삶은 항상 크고 작은 고민과 고난과 고통과 고역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매일 같이 고난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가 전하는 메시지가 위로가 되고 능력이 되어, 환난을 이기게 하시는 승리하신 우리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날마다 역사하는 삶이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인식과 자세에 대해 세 가지 고난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 고난이 나오는 12,13절을 읽어 드립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아멘.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오는 고난이 우리 자신을 연단하려는 불 시험이라고 말합니다. 불 시험 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이곳과 요한계시록 두 곳 등 총 세 곳에서만 언급되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는 재앙들을 불 사른다”고 하였고, 또한 바벨론이 불에 타는 연기를 보고 “저렇게 큰 도시가 또 어디 있겠는가!” 라고 소리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나오는, 불사른다, 불에 탄다라는 말이, 불 시험과 같은 단어입니다.
심판과 멸망을 상징하는 불 시험이라는 단어가 연단이라는 뜻으로 설명이 되었습니다. 뜨거운 불 속에서 쇳덩이가 제련되어 강한 금속으로 변화 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 또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안에서 달구어지고 제련되어서 고난을 이겨내는 성숙한 믿음으로 자라나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불시험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불 시험이 오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고난이 찾아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낙심과 절망의 마음 일 텐데, 이미 예견 되었다는 듯이 그 고난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당당히 맞서 싸우라고 하는 권면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고난을 즐거워하라는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고난에 대해서 이상히 여기지 않고,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 대해 취해야 할 진정한 자세와 태도임을 분명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사도의 뒤를 이은 교회 지도자들을 ‘속사도(續使徒, Apostolic Fathers)’라고 불렀습니다. 속사도는, 사도들에게 개인적인 가르침과 영향을 받은 직속 제자라는 의미입니다.
속사도 중에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였던 ‘이그나티우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초대 감독은 베드로 사도로 알려져 있고, 베드로에 이어 두 번째 감독이 바로 이그나티우스입니다. 그는 베드로와 바울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폴리캅과 함께 사도 요한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자기 스스로을 가리켜 “데(쎄)오포로스”라고 했는데, 이 뜻은 ‘하나님을 지고 가는 자(bearer of God)’ 라는 뜻인데,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자기 애 적 표현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나타내기 위한 호칭이었습니다. 그는 박해가 심했던 트라얀 황제 시대인 주후 108년쯤에 순교한 것으로 추정 됩니다.
당시 교회에 대한 핍박이 날로 심해졌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순교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면 영광이라고 생각하여 순교 당하기를 기뻐했습니다. 그러자 압제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을 보고, 교회 지도자들을 잡아다가 죽이지는 않고, 가둬 두거나, 조롱하거나, 창피를 주는 방식으로 교회를 탄압했습니다.
이그나티우스도 박해자들에게 붙잡혀서 일시에 죽임 당하지 않고 안디옥에서부터 로마까지 압송하 되었는데, 직행으로 로마에 간 것이 아니라 압송 되는 동안 수 많은 항구와 도시를 걸쳐 순회 하면서 이송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을 돌아다닌 이유는, 이그나티우스가 제풀에 지쳐 순교하려는 열의가 식게 만들고, 존경할 만한 지도자가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것을 보고 기독교인들을 공포와 절망감으로 몰아가서 교회들이 스스로 몰락해 가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로마로 압송되는 동안 이그나티우수는 일곱 통의 편지를 써서 교회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중에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모든 교회들에게 쓰노니, 반드시 명심하라! 나는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죽을 것이다. 너희는 방해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간곡히 청하노니, 나에게 적절하지 않는 호의를 베풀려고 하지 말라! 그냥 짐승들의 밥이 되도록 놓아두어라! 그 일을 통해 나는 하나님에게 이르게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밀알이다. 그러니, 짐승들의 이빨이 나를 가루로 부수어, 그리스도의 순전한 빵이 되도록 하라!
형제들이여! 부탁 하건데, 나를 살리려고 하지 마시오! 내가 죽은 상태로 있는 것을 바라지 마시오! 나는 하나님께 속하기를 바라니, 나를 세상에 넘겨주지 마시오! 내가 순전한 빛을 받게 해주시오! 그러면, 내가 그곳에 도달했을 때, 나는 실지로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오! 내가 나의 하나님의 고통을 본받는 자가 되도록 허락해 주시오!」
이런 결사각오의 심경을 담은 편지를 남긴 이그나티우스는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들에 의해서 몸이 찢겨진 채로 순교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선배들이 순교한 역사를 살펴 볼 때, 과연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 이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나는 고난에 대해 어떤 자세와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숙연하게 만듭니다.
고난으로 다가오는 불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참으로 우리 마음을 심란 하게 하고, 부담 가게하고, 숨고 싶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누구도 했으니 너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13절 후반부에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고난을 즐거워 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고난 다음에는 반드시 영광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고난 부활 영광이 있었다는 것은,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영광도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내 스스로에게, 과연 나는 고난을 맞이하여 맞싸움을 벌일 영적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정신에는 고난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늘 영광 하나만을 바라보며 최고 난이도의 고난인 죽음의 길을 당당히 걸어갔습니다.
부활절 이후 우리의 삶은 예전 보다 달라져야 하고 나아져야 합니다. 특히 환난과 고난, 문제와 상황 앞에 섰을 때 마음가짐과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생각 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사도 바울이 일평생 붙들고 살았던 이 말씀을 우리도 붙들고 고난의 지뢰밭인 인생길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더 이상 닥쳐올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어떤 고난 앞에서도 걸려 넘어지지 마시고, 주실 영광, 받을 영광만을 바라보며 환난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우리 주님의 이름을 앞세워 불 시험 앞으로 당당히 나아가시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고난이 나오는 14~16절을 읽어 드립니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
앞에서는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시더니, 여기에서는 치욕을 당하면 복있는 자라고 하였고,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단,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치욕과 고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언가를 하다가 당하는 치욕과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은 바로 14절에 후반부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위로와 격려와 능력을 한 없이 부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이든, 치욕이든 다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입혀지면 죽음(순교)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 순교 역사에서 얼마든지 증명이 되었습니다.
1951년에 제작된 ‘쿠오바디스’라는 오래된 기독교 고전 영화가 있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장편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입니다. 영화에서는 당시 로마 황제 네로가 기독교인을 박해하며 콜로세움 원형 경기장에서 기독교인들을 짐승들에 의해 죽임 당하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경기장 안으로 끌려가던 무리들 중에 한 여인이 아이를 품고 이렇게 말합니다. “애야, 담대 하자, 고통은 그리 길지 않다. 금방 끝난다. 오! 주여 우리를 도우소서”
금방 짐승에게 몸이 산 채로 찢겨질 상황에서도 금방 끝 난다라고 말하는 담대함이 소름끼치도록 놀랍습니다. 그들에게는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셨음을 똑똑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베드로도 등장하여 로마 황제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 사도의 외침도 네로에게는 그저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외경인 ‘베드로 행전’이라는 책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네로에게 죽임 당할 것을 염려한 성도들이 베드로에게 피신할 것을 권고하자 베드로는 로마를 빠져 나갑니다.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너무 당환한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쿠오 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나의 양들을 버리고 로마를 떠나려고 하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간다. 베니오 로맘 이떼룸 끄루치피지(Venio Romam iterum crucifigi)”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크게 참회하고 곧 바로 로마로 돌아가 성도들과 함께 지내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채로 순교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이후에, 부활 신앙으로 무장한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피 흘림의 순교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피의 역사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죽음과 맞서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그 이름을 지킨 순교자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그들 위에 함께 하셨습니다. 역속하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 중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죽음까지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으로 함께 하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순교자들의 기록이 있는 반면에, 15절을 보면, 살인, 도둑질, 악행, 남을 간섭하는 일로 고난당하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과 비난을 받는 패 악질로 고난을 받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죽어도 영광 받을 고난이요, 악행 하는 자는 살아서 부귀영화를 누릴지라도 멸망당할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하여 고난을 참아내지는 못할망정, 악행을 저질러 화를 자초하는 고난을 일으키는 행동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자들은 십자가의 주님을 계속해서 못 박는 자들입니다.
영광 받을 고난을 당하는 자들, 명망 당할 고난을 당하는 자들, 이 둘 중에 우리는 당연히 영광의 고난에 속한 자들입니다. 죄와 악으로 고난당하기를 자초하는 어리석음에서 속히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 받는 영광의 고난에 즐거움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부활절 이후 우리의 삶이 이러해야 합니다.
끝까지 이기는 자에게는 반드시 영생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피할 수 없는 길이라고 한다면, 모든 것을 이기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여 주심도 잊지 마십시오.
00교회 모든 성도는 일평생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시면서, 고난을 스스로 만드는 자들이 아니라, 믿음을 지켜 가기 위해 닥쳐오는 어떤 고난도 능히 이겨 낼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 고난이 나오는 17~19절을 읽어 드립니다. “17.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 아멘.
마지막 심판 때에 고난에 대해 반드시 평가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마지막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 내가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 모두 다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18절을 보십시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의인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겨우 겨우 구원 받는 다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들 이라고 하는 사람들, 즉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정말 현실적인 말씀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겨우 내 앞가림 정도만 한 다면, 내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할 여지가 있겠느냐는 말씀이며, 또한 내가 먼저 믿은 자로서 겨우 기본 적인 것도 해내기 힘들게 신앙생활을 이어 나간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보고 예수 믿고 변화 받고 열매 맺으며 고난을 이겨가라는 말을 할 수가 있겠냐는 말씀입니다.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어른을 인도할 수 없고, 맹인이 어찌 다른 사람의 길 안내자가 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참 현실적인 말씀이고, 연약한 내 신앙생활을 반성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18절이 오늘의 설교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려지는 우리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정말 잘 살아야 합니다. 19절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9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창조주께 맡기십시오.” 아멘.
이 말씀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특히 믿음을 지켜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고난은 의무이지 필수이다 라는 것이 전제 되어 있습니다. 그 고난들이 내 삶을 짓누르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선한 일,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일들을 꾸준히 해나가면서, 내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맡기며 살아가야 된다고 했습니다.
“아이고 힘들어 죽겠어, 짜증나 못살아 내가 미치겠네, 얻다 대고 그 따위 말을 해, 죽어도 용서 못해, 에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남들 다 하는데 뭐, 저 웬수 덩어리 다리나 부러져 버려라, 돈도 없고 못 배운 것들이 어디 무식하게....” 이런 말들을 익숙하게 하는 사람들이 과연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삶이 반복되는데도 겨우 구원 받는 다는 것도 참으로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와 저 사람은 진짜 한결같아, 아이고 저 사람 하는 거 봐봐 딱 봐도 예수 믿는 사람이네, 아니 그 어려운 일 당하고도 어쩌면 저렇게 담대할 수 있지,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어쩜 저리 천사 표야, 이야 저 얼굴 좀 봐봐 빛이 나내 빛이 나 그냥 예수네 예수” 삶의 현장에서 이런 말들을 들을 수 있다면 고난 중에도 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아닐까요?
예수님이 십자가 길을 가지 않았다면 부활은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모습을 삶에서 보여주지 못한 다면, 누가 복음의 메시지를 들으려 하겠습니까? 우리가 고난 가운데에서도 영광을 바라보며 기쁘고 감사하게 살아가지 못하고 매일 분노와 저주와 악행 속에 살아간다면 누가 예수님 믿기로 마음을 돌리겠습니까?
하나님은 물론 이거니와 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많은 이웃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내게 고난이 있을 지라도 영광을 바라보며 성령님과 동행 하는 가운데 이겨내는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기셨듯이 우리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고 선포하셨기에 우리는 환난과 고난 앞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에게는 승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영생의 권세가 있음에 항상 자부심을 느끼시고, 담대하게 살아가십시오.
이제 남은 인생의 기간 중에 어떤 고난이 닥쳐올지라도 예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시고, 다 이겨 내셔서 반드시 승리의 길로 나아가십시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성령님이 함께 하셔서 모두 다 완벽한 승리의 주인공이 되게 하실 줄로 굳게 믿습니다.
부활절 이후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믿음과 소망을 품고 더욱더 삶의 자리에서 내 믿음을 지켜 가는데 최선을 다하시고, 의인의 호칭을 주신 것에 합당하게 거뜬하고 넉넉하게 인정받고 칭찬 받는 구원 받은 자녀들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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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죄인이 어디에 서리요, 이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태도가 담대하여지도록 역사하여 주시고, 오직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붙잡고 천국을 향하여 인내하며 끝까지 이기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