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고통 2 (계 9:5)
양심의 고통 2 (계 9:5)
5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이 시간에는 “양심의 고통”이라는 제목입니다. 양심의 고통은 아무나 느끼는 고통이 아닙니다. 육의 사람이나 외식적인 믿음 등 신앙 양심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은 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또 한 사람, 신앙 양심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보혈로 말미암는 용서의 복음을 견고히 믿는 사람은 그 고통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되 너무 율법적이거나 복음을 알지 못할 때 그 양심의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양심의 고통이란 어떤 것일까요?
1. 완전히 죽이지는 못합니다.
5절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신다는 문구 속에는 죽음과 방불한 행위가 저질러지고 있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전갈이 많은 나라는 전갈에 쏘여 죽은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전갈에 쏘이면 2시간 이내에 사망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처럼 롬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 겔18:20에도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했습니다. 율법의 정죄로 양심이 고통을 받으면 심령이 죽습니다. 그런데 범죄한 신자의 심령은 불신자와는 달리 생명의 뿌리는 살아있는 그런 형태의 죽음입니다. 마치 가지는 죽어도 뿌리는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사1:8-9에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그래서 회개하면 다시 소생하고 다시 정죄로 죽었다가 또 다시 소생하기를 반복합니다. 복음의 기초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정죄를 받는 순간 다 쏟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을 잘 알지 못한 사람의 비극입니다.
성경에 범죄한 심령은 죽을 것이라 했듯이 양심의 정죄 가운데 있을 때는 영적 생명성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영적 교통이 끊어지는 등 심각한 현상이 옵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다시 살아납니다.
완전히 죽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율법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지옥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천국도 마음에서 시작하고 지옥도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이 죽지는 않고 다시 살려 고통이 계속되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막9:48-49에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영혼은 죽지 않아요. 불신자의 사망의 부활 이후에는 그 육체도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막9:45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지옥이 율법 아래서 시작된다는 사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2. 양심의 고통은 원인이 있습니다.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여기 다섯 달 동안 괴롭게 한다 했습니다. 5는 고통과 관계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 받으신 날도 금요일 5와 관계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상처도 크게 다섯 곳입니다. 그래서 고통의 수라,
또 5는 모두를 상징하는 10의 절반으로 미완성 중간 절반의 수라, 그리고 한 편 손가락이 다섯이듯이 책임의 수라, 그리고 또 하나는 모세오경 율법책이 다섯 권이듯 율법의 수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미완성 상태에서 오는 율법적 고통을 가리킵니다. 이미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을 알되 율법만 알지 복음 신앙이 아직 미완성일 때 받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이건 누가 지켜주는 것 아닙니다. 복음을 알아도 복음으로 자기 양심을 지키지 못하면 자기 책임입니다.
신랑을 맞는 다섯 처녀를 보세요. 그러나 기름 준비하지 못한 절반인 다섯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등잔의 형식만으로는 주님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기름은 성령이요, 복음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1,500년 동안 고통당하고,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한 것도 복음보다 율법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3:19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꾸만 원망했습니다. 즉 하나님께만 원망을 돌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얼마나 의로운가 봐라 하시고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자기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가장 큰 임무입니다. 그 결과 범범함으로 말미암아 징계가 오고 심판이 왔습니다.
이처럼 율법으로 말미암는 심령의 고통도 큽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관심을 갖는 사람일수록 그 정죄의 고통을 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책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사망과 악령에 눌리는가 하면 삶에 저주가 임합니다. 그리고 많은 심령들에게까지 답답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라는 초보 단계에 오래 머물지 말고 확실히 졸업하시기 바랍니다.
3. 그 고통이 지속적이란 사실입니다.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통증이란 대개 처음에는 크지만 10분 정도 시간이 지나면 곧 약해집니다. 그러나 전갈에 쏘이면 다릅니다. 전갈에 쏘이면 근육을 마비시키면서 호흡곤란과 여러 시간 동안 그 통증이 지속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고통이 그와 같습니다. 그 능력과 생명으로 활발하던 심령이 꼼짝할 수 없습니다. 마치 삼손이 머리카락을 자를 후 힘을 쓸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호흡곤란이 오듯 기도가 안 됩니다. 그리고 범죄를 자각하면 언제든지 계속하여 고통이 옵니다.
이 고통을 피할 완전한 방법은 속죄의 복음에 서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일반적인 방법은 망각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다른 일에 몰두한다든지 수면을 취하면 비교적 안정적입니다. 그러나 계속 잘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자도 악령으로 말미암아 가위눌려 편히 자지 못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절기 지키려고 올 때 예루살렘 주변의 험준한 눈물의 골자기를 통과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품에 온전히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율법의 골자기를 통과하게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이나 거룩한 사람이나 거룩한 일을 만나면 양심이 더 예민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장차 불신자들에게도 주어질 일련의 과정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양심을 포기하고 어둠 가운데 살지만 그들의 양심에 빛이 비쳐지는 날 그들은 천국에 살기보다 스스로 지옥을 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그러기 전에 이 땅에서 예수 믿어 율법의 밝은 빛 아래서도 피할 수 있는 복음적 신앙을 마련하지 않는 한 사람도 그 하나님이 진노를 피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고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과거 현재 미래의 죄과 죄악성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다는 진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죄인일지라도 죄 없다 하시는 그 진리를 믿으시고 양심의 자유와 평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복음의 확신 안에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온갖 천국의 아름다운 영생 복락을 마음껏 누리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