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양심의 고통
9:4 양심의 고통
4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이 시간에는 “양심의 고통”이라는 제목입니다. 혹시 신앙생활하면서 마음의 정죄감으로 양심의 찌르는 고통 때문에 방황하는 사람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만나기 전 율법 아래서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했던 그 과정을 저도 겪어 보았기 때문에 심령이 당하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 고통은 전갈의 쏘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이 쏘는 고통은 각인에 따라 세상 근심일 수도 있고, 혹은 양심의 찌르는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사랑 받고 인생을 평안히 살려면 철저히 회개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죄사함의 진리를 깊이 깨달아 믿음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특히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황충이 해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황충이 노리는 대상은 자신의 먹이인 지상의 초목이 아니라 복음의 확신을 갖지 못한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황충이 해하는 대상은 불신자냐 신자냐의 구도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 그 구도라는 것입니다. 즉 피의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가 받는 고통을 말씀하는 것이다. 즉 율법의 정죄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이 고통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통은 인침 받지 못했으니 아직 복음의 확신에 이르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기 시작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받는 심령의 고통이란 점입니다. 즉 고전15:56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한 말씀대로 하나님을 알되 복음을 모르는 자의 고통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율법의 찌르는 고통을 당하지 않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1. 하나님을 모르는 육신의 사람입니다.
4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여기 풀은 무엇일까요? 그냥 풀이 아니라 땅의 풀입니다. 땅은 세상입니다. 풀은 육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벧전1:24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육체를 풀에 비유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연인은 율법의 찌르는 고통을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각인이 나름대로 양심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들이 갖는 신앙의 양심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 세상을 사랑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 성경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잘 모릅니다.
혹시 양심을 범했을지라도 그 고통은 신자가 가지는 양심과는 다르며 나아가 그들은 세상의 쾌락으로 즐거움을 삼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찌르는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신앙 양심이 없는 불신자는 전혀 그 고통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고통에서 제외된 땅의 풀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부러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잠시 잠깐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롬14:10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하였고, 눅9:48-49에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했기 때문입니다.
2.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다시 4절 “푸른 것이나” 풀과 같지만 종류에 있어서는 포괄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육신의 색깔을 가진 사람입니다. 육신이면 육신이지 무슨 육신의 색깔일까요? 그것은 예를 들면 하나님을 알지만 아직 육신에 속해서 어떤 신앙적 양심조차 형성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삶이 구별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롬1:21-23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 마음에는 신앙은 물론 율법조차 없습니다. 죄도 모르고 회개의 자각도 없습니다. 세상의 자연종교처럼 자신이 필요해서 하나님을 택했을 뿐 하나님의 뜻도 부르심도 정의도 모르고 신앙의 입문에도조차 이르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양심은 불신자와 같아서 율법의 정죄가 주는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3.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종교적 형식만 갖춘 사람입니다.
다시 4절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수목은 나무인데 나무가 뭘까요? 구약에 사람을 나무로 비유한 곳이 많습니다. 신약에도 막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벳새다에서 한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24절) 말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나무는 흔히 사람을 비유하는데 썼습니다. 그런데 처음 안수하실 때는 사람으로 보였다, 나무 같은 것으로 보였다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안수하니 사람으로 정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무란 사람이긴 사람이되 나무와 유사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사람이되 하나님 형상의 사람과는 같지 않는 사람이 바로 각종 수목입니다. 즉 거룩한 종교적 형식만 갖춘 외식적인 자가 이와 같습니다. 옛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 범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지나 종교적 스승이요 지도자요 세상과 분리됐다는 파르쉬 즉 바리새인이라 해서 성인 취급을 받는 거룩한 이름을 가졌지만 속내는 신앙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외식자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를 포장하기 위해 외식과 격식만 추구할 뿐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신앙을 갖지 못했습니다. 바울과 같이 신앙적인 갈등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은 참 복음을 찾아서 예수 앞에 나왔겠지만 그럴 마음의 필요성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마 23장에 이들에 대해 '화 있을 찐저' 라는 말씀으로 7번이나 선언하고 계실까요? 그들은 스스로 대단한 성인이요, 큰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행세했지만 실천도 없고 인간이 만든 유전을 위해 그들이 외우고 가르치는 율법조차도 마음으로는 배척하는 화인 맞은 양심이었습니다.
이런 외식적인 사람은 양심의 고통이 없어요. 그가 믿는 말씀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교회에 나와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면서도 세상에서는 양심 던져놓고 사는 사람 있습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외식하지 말고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은 현실에서는 양심의 찌르는 고통은 없지만 스스로 하나님께 버림 받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4.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복음을 확실히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이마에 인침을 받은 사람들은 해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인침이란 확신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로 믿어지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로 믿어지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진다면 인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속죄하셨다는 피의 복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합니다. 회개와 정죄감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아픔은 있을지라도 율법의 찌르는 정죄는 받지 않아야 합니다. 피의 복음에 견고히 서야 합니다.
그래서 롬5:1-2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늘 도전을 받습니다. 이렇게 양심의 평안함을 누릴 정도를 넘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주신 그 영광을 바라보며 항상 즐거워하는 그 믿음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입니다. 즉 칭의만이 아니라 성화와 영화까지도 믿음으로 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찌르는 고통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직 율법의 찌르는 고통 가운데 있다면 진정으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온전히 믿어 양심의 평안을 누려 황충의 쏘는 고통에서 온전히 피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