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나팔 2 (계 8:8-9)
복음의 나팔 2 (계 8:8-9)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이 시간에도 “복음의 나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붑니다. 나팔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나팔 앞에 죄인의 마음은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나팔이 불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아 예수 믿어 구원 얻게 되었음을 깨닫고 감사 감격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럼 복음의 둘째 나팔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둘째 나팔을 해석하는 중요한 동사가 본문에 세 개가 있습니다. ‘변하고’, ‘죽고’, ‘깨어지고’ 이 세 가지입니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변하고),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무엇이 변하고 죽고 깨어집니까? 이것은 우리의 마음일 수도 있고 혹은 구원의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우리 가슴 속에 감동으로 와 닿게 될 때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내 방법론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내 의, 내 방법 즉 율법적 구원에 큰 변화가 옵니다.
그럼 복음이 나타날 때 율법은 어떻게 될까요?
1. 복음은 율법의 문제를 깨닫게 합니다.
8절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이 말씀은 율법의 권세가 사라지는 장면입니다. “불붙는 큰 산”은 불붙는 산과 큰 산의 의미가 합해진 말입니다.
“불붙는 산”은 시내산을 연상시킵니다. 히12:18에 “불이 붙는 산”이 나오는데 모세가 올라가 율법을 받았던 율법의 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시기를 구하였던 두려운 산입니다. 지금 새로 발견된 시내산의 봉우리는 용암이 녹아서 검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 산입니다. 큰 산이란 흔히 감당치 못할 큰 문제나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슥4:7에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하실 때 이것은 큰 문제를 가리켰습니다. 그러니까 불붙는 큰 산은 이 두 가지 의미가 합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난제를 강조한 표현입니다. 즉 인간은 율법 아래서 그 법을 지키려고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넘어지고 쓰러지고 그래서 좌와 사망과 저주만 이루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바로 율법이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로마서 7장의 율법 아래에서의 저주와 방황과 사망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복음을 몰랐을 때 율법 아래서 얼마나 방황했습니까? 롬7:24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 만나 복음을 안 후에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롬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나팔이 가져온 승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일 뿐 율법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불붙는 큰 산과 같이 불가항력적인 정죄와 고통의 문제를 가져다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복음은 율법적 방법을 폐합니다.
8절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불붙는 큰 산이 바다에 던져졌다는 것은 일종의 폐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폐해진 것은 아니고 율법으로 구원 얻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방법론적인 폐기를 말합니다.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졌는데 바다에 던짐이란 미7:19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 선지자는 죄를 던졌다고 했지만, 계시록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죄를 죄 되게 만드는 율법을 던졌다고 합니다.
율법의 폐기란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폐기를 말합니다. 죄와 선이 무엇이고 또 구세주가 누구며 우리가 누군지 알려주는 거울로서의 율법은 존재하지만 구원의 방법으로서의 율법은 폐기된 것입니다.
그래서 롬3:27-28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했습니다.
그런데 바다에 던짐의 의미는 폐기 외에도 믿음을 강조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더러 바다에 던지라 하여도 믿고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3. 복음은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합니다.
8-9절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ㄱ. 먼저, 율법은 생각의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었습니다. 피로 변한 것은 물인데 물은 생각과 사상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복음이 생각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즉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방법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지금 내가 하려고 애쓰는 것이지만 복음은 이미 예수 안에서 이루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우리는 무엇을 구하기 전에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더 많이 생각의 복음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ㄴ. 그 다음 육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십니다.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바다의 생물은 고기도 말하지만 창1:21에 “큰 바다 짐승들”은 원문에 ‘길게 뻗은 것들’을 가리키는데 공룡 해룡을 가리킵니다. 이 바다의 짐승들은 우리 육신적인 면의 상징입니다. 이런 우리 육신으로는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법론적 폐기입니다.
그래서 롬8:3-4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ㄷ. 그 다음,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하십니다.
9절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여기 배는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킵니다. 노아시대에 배가 많았지만 노아의 방주만 승리한 것처럼 험한 세파를 이기고 승리해야 할 배들이 깨어졌습니다. 삼분의 일이라 해서 숫자적 삼분의 일이 아니라 배가 기능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죄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복음이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승리는 오직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승리합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실 때 우리도 그 안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때 그 생명을 받았기에 그러므로 나도 승리했다고 믿으세요. 승리하게 해달라고가 아니라 승리를 찬양하세요. 승리의 깃발을 굳게 붙잡으세요. 복음은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한 온전한 구원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나팔이 울려 퍼질 때 인간의 의와 방법으로 구원 얻으려고 했던 온갖 쓸데없는 생각은 다 사라지게 됩니다. 내 의, 내 방법, 내 주관, 내 생각, 내 이론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목하네, 믿으면 하겠네 한 찬송 가사처럼 구원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말고 주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온전히 구원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